쓰레기통

악기연주

dalpina 2020. 10. 10. 17:39

일상을 지내면서 슬픔과 분노하는 장면과 말이 떠올랐고 그 뒤에는 후회가 따라왔다. 아직 나는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자학을 해결책으로 삼는 버릇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 했다면, 내가 - 하지 않았다면, 내가 - 했기 때문에 나의 불행과 고통, 그들이 가했던 처벌은 합당하다는 괴랄한 논리가 굳건한 성이 되어 나를 가두고 있다. 어느정도 허물어진 성이지만 이따금 나의 정신은 그 성의 가장 깊숙한 지하, 고통과 슬픔이 불행을 연주하는 곳에 갇혀 음율을 베끼고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부터 플륫을 연주했었다. 방과 후에 연주하는 절친의 모습이 부러워 부모를 졸라 시작한 악기였다. 곧 그 친구가 플륫이 아니라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것을 알고 바꾸고 싶었지만 동시에 악기를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아 그만두고 다른 악기를 시작 한다고 나무랄 엄마의 호통과 어린 나이에도 미약하게 심어져 있던 열등감-나는 도레미도 연주하지 못하는데 친구는 벌써 학교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 연주를 한다는 사실-에 놓지도 못하고 꾸역꾸역 연습을 나갔었다. 순간의 치기로 시작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나의 학습 진도는 매우 뒤쳐졌다. 같이 시작한 동기들은 기본서 1권을 끝내고 2권에 들어갈 때 나는 아직 1권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5학년 말이 될 즈음에 정신을 차리고 진도에 속도를 냈으나 졸업때까지 나는 간신히 기본서 3권을 떼었다.

중학교에 올라가자 초등학교 플륫 방과후 선생님이 내 중학교에서 플륫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되어 중학교 3년 내내 레슨을 나갔다. 그러나 전공으로 배운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취미로 배운 것이기 때문에 나는 플륫용 바이엘 1권을 간신히 끝냈다. 이후 고등학교에는 플륫반이 없어 악기를 잠시 놓았었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내가 11학년이나 12학년(만 18~19) 즈음 일 것 이다.

10학년때 같이 지내던 언니(욕 방패막이)가 사라지고 내가 맏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때다 싶었는지 나에대한 비난과 처벌의 수위가 점점 높아지던 때 였다. 분명 11학년 초반까지만 해도 나밖에 없다던 그들은 내가 하나를 실수하자 셋을 실수한 것 처럼 혼냈고 그에 나는 자신감과 확신을 잃어 실수가 더욱 잦아졌다. 

아직은 내가 나를 죽이기 전, 정신이 붕괴되기 전, 꾀임에 침몰하기 전이었음에도 나는 상당히 수동적으로 변해 있었다. 코끼리를 어릴 때 부터 묶어 키우면 커서 줄을 풀어둬도 도망칠 수 없다는 말이 딱 나와 같은 꼴이었다.

내가 다녔던 곳은 보수 기독교 학교였다. 정해진 드레스코드(복장)에 따르지 않으면 벌점을 받고 심하면 보호자가 소환 되었다. 매 학기마다 성경 수업을 들어야 했고 매주 목요일마다 전교생이 한시간씩 예배를 드려야 했다. 교회에서는 설교를 시작 하기 전에 찬양을 하고 그 찬양은 찬양팀이 이끌었다. 우리 학교에는 몇 년 동안 찬양을 이끈 신실한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이 내가 12학년 즈음에 졸업을 해서 새로운 찬양팀이 필요했다. 우리는 12학년이기 때문에 목사가 꿈인 남자애가 리더를 맏게 되었는데 아무 연주나 가능한게 있으면 자유롭게 지원해도 된다고 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미국에 들고 온 플륫이 생각났다. 오랫동안 손을 놓았지만 도전해 볼 만 하지 않을까? 설레는 마음에 플륫 연주자도 지원이 되냐고 물었더니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악보를 받아들고 집에서 연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때 나와 집 주인과의 관계는 최악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집 주인은 목사였다. 작은 한인교회를 담당하고 있었고 전혀 목사답지 않은 속물적인, 그러나 자기합리에 능한 자였다. 예전에 모두와 관계가 좋았을 적엔 학생이 많아졌기 때문에 찬양단을 하는게 어떤가 하고 연습해 합주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된지 오래였다. 학교에서 찬양단 연습을 하려면 따로 남아야 했기 때문에 나는 집주인에게 학교에서 찬양단에 서기로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문제가 될 줄 전혀 몰랐다.

집주인은 교회에서는 찬양단에 서고 싶다는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으면서 학교에서는 왜 그렇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냐며 나의 도전을 비하했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학교에 진심을 다한다고 비아냥댔다. 그는 말 뿐만 아니라 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처벌로 집 안에서 나의 존재를 무시했다. 같이 지내던 다른 학생들은 그 공기를 불편해 했고 그런 선택을 한 나를 비난했다. 결국 나는 친구에게 말해 미안하지만 찬양대에 설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기쁘게 선택하고 슬프게 번복한 약속이 많아졌다.

당시의 친구들은 티는 내지 않았겠지만 나를 거짓말쟁이나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유학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처음 정신과에 방문해 약을 받아 먹었을 때 나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을 느꼈다. 하늘이 이렇게 파랬었는지, 별빛이 이렇게 반짝였는지, 내가 손을 움직이고 두 발로 걷는게 얼마나 경이로운지 나는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분명히 알고 있던 것들인데 무엇이 나에게 세상의 색을 빼앗아 갔는지, 빼앗긴 줄도 몰랐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슬픔과 분노는 이제 지나갔지만 가끔씩 마음에 일렁이는 파도는 남은 잔재들을 심해에서 일으켰다. 이제는 잘못 된 것을 알았지만 무엇이 나를 비이성과 불합리로 이끌었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때는 잔재물이 뭍으로 올라왔을 때 화들짝 놀라며 도망가기 급급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잔재물이 파도와 절벽에 부딪혀 깎이며 조약돌이 되도록, 그래서 내가 걸어온 길 위를 장식해주길 기다리고 있다.